예루살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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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전체를 점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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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erusalem Dome of the rock BW 13.JPG|thumb|350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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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9일 (목) 01:19 판
예루살렘 (Jerusalem, 히브리어: יְרוּשָׁלַיִם 예루샬라임, 아랍어: القدس 알 쿠즈[*])은 예로부터 종교 분쟁에서 불씨가 되어온 중동에 있는 도시이다. 2006년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서 역시 적지않은 문제점을 낳고 있으며, 도시가 행정상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는 상태이다.
지리
예루살렘은 사해의 북쪽으로 약 28Km 떨어져 유대아 산맥의 언저리의 해발 780m에 위치하여 있다. 지형적으로 서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와 동쪽으로는 힌놈 골짜기의 가운데 솟은 구릉에 기원전 약 3000년 이래로 사람들이 부락을 이루어 살은 것으로 추측된다. 산악 지형이 가진 장점을 살려 예루살렘은 외부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성채를 중심으로 서서히 도시의 윤곽이 잡혔다.
역사
통일 왕국 시대
예루살렘이 오늘날과 같은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원전 약 1000년 경에 이스라엘의 선조 다윗 왕이 구릉에 위치한 '시온의 성'이라 불리던 도시를 정복한 후 유대인들은 이 곳을 '다윗의 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무엘 하 5,7: 역대기 상11, 4-7: 열왕기 상 8, 7).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에 중요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다윗의 이름 밑에 유대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이 합병된 후, 예루살렘은 통일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사무엘 하 2, 4: 5, 3). 다윗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은 도시에 왕궁과 신전 및 성채를 새로이 건설하고 언약궤를 신전 안에 보관하였다고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열왕기 상 6-8).
남북조와 이민족의 지배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자(BC 933년) 이스라엘은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고 예루살렘은 남조(南朝) 유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587년 신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에게 정복되어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에 억류되었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왕 키루스 2세에게 석방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로마 공화정에 점령되었다. 기원전 37년 헤로데 대왕이 즉위와 동시에 성전을 개축하였다. 70년, 135년의 두 차례 봉기가 있은 후 로마는 전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고 '이방인의 도시'라 했다.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화됨에 따라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중세
638년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으나 그들은 기독교의 성지를 존중하였다. 동시에 이슬람 사원이 솔로몬의 성전 터에 세워졌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1187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1260년 훌라구의 몽골군이 예루살렘 근방까지 육박했으나 바이바르스가 이들을 몰아냄으로써 맘루크 왕조의 성지 관할권이 확립되었다.
오스만 이후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예루살렘을 접수하여 400년 내내 지배하였다.
크림 전쟁 중에는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등의 성지 관리권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1차 대전 중인 1917년 영국에 점령되어 위임통치령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이민이 진척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동예루살렘(요르단)과 서예루살렘(이스라엘)으로 분리되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전체를 점령하였다.
바깥 고리
- (히브리어/아랍어/영어/러시아어) 예루살렘 시의 공식 홈페이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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