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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후 선도를 권했던 김종섭(金鍾燮)을 만나, 그로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는 이야기와 그가 권하는 한문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천로역정(天路歷程)』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97년(29세)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2년 조사가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을 맡아 전도하였다.<ref name=":1" /> |
하산후 선도를 권했던 김종섭(金鍾燮)을 만나, 그로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는 이야기와 그가 권하는 한문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천로역정(天路歷程)』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97년(29세)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2년 조사가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을 맡아 전도하였다.<ref name=":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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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교 전 [[관우]]를 섬기는 [[무속]]인으로서 한 무리의 제자들을 거느릴 정도로 신통력을 인정 받았었던 그는 타고난 영적 감응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부흥회를 이끄는 데 자질을 보였다. 그러다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를 위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중에 대중앞에서 공개 회개를 대중 앞에 하였다. 그의 공개회개를 계기로 다른 사람들의 회개도 빗발쳐 나왔고 이것이 [[평양대부흥]]의 시점이 되었다고 한다.<ref>{{서적 인용|저자=김선주|제목=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출판사=삼인|연도=2009|쪽=p.220-221}}</ref> |
입교 전 [[관우]]를 섬기는 [[무속]]인으로서 한 무리의 제자들을 거느릴 정도로 신통력을 인정 받았었던 그는 타고난 영적 감응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부흥회를 이끄는 데 자질을 보였다. 그러다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를 위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중에 대중앞에서 공개 회개를 대중 앞에 하였다. 그의 공개회개를 계기로 다른 사람들의 회개도 빗발쳐 나왔고 이것이 [[평양대부흥]]의 시점이 되었다고 한다.<ref>{{서적 인용|저자=김선주|제목=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출판사=삼인|연도=2009|쪽=p.220-221}}</ref><ref>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 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죽은 친구의 부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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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간]]<ref>[[아간]]은 [[구약성서]]의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인물이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에서의 정복전쟁에 실패하자,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여호와]]께 물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중에 자신의 소유를 횡령한 자가 있어서 그렇다고 말해주었고, 여호수아는 전리품을 횡령한 아간과 그의 일족들을 처형하였다. 길선주 목사가 자신을 아간이라고 부르면서 횡령죄를 지은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사실은 그가 높은 도덕성과 순수한 양심을 가진 사람임을 말해준다.</ref>과 같은 자입니다."<br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br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br />"나는 잘 돌보아 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br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br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br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죽은 친구의 부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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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 활동 === |
=== 목회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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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는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했다. |
길선주는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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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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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안창호]]가 [[독립협회]] 평양 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는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함께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체포된 바 있고, 이때 [[신민회]] 회원인 장남 [[길진형]]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1917년]] 사망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도장을 [[이승훈 (1864년)|이승훈]]에게 맡기고 [[3월 1일]] 당일에는 지방에 있었는데, [[김병조 (1877년)|김병조]], [[유여대]], [[정춘수]]와 함께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은 네 명 중 한 명이다. 1919년 당시 평균연령이 40대였던 시기에 이미 51세였고, 안질로 인해 시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1919년]] [[3월 1일]] 당일 태화관 모임 불참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길선주는 체포되었고 미결수로 2년 가까이 구류된 이후 체포된 민족대표 32인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
[[1897년]] [[안창호]]가 [[독립협회]] 평양 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는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함께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체포된 바 있고, 이때 [[신민회]] 회원인 장남 [[길진형]]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1917년]] 사망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도장을 [[이승훈 (1864년)|이승훈]]에게 맡기고 [[3월 1일]] 당일에는 지방에 있었는데, [[김병조 (1877년)|김병조]], [[유여대]], [[정춘수]]와 함께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은 네 명 중 한 명이다. 1919년 당시 평균연령이 40대였던 시기에 이미 51세였고, 안질로 인해 시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1919년]] [[3월 1일]] 당일 태화관 모임 불참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길선주는 체포되었고 미결수로 2년 가까이 구류된 이후 체포된 민족대표 32인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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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6일 (금) 02:39 판
길선주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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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 | 평양노회 |
개인정보 | |
출생 | 1869년 3월 15일 조선 평안남도 안주군 성내면 후장동 |
사망 | 1935년 11월 26일 오전9시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잉차면 고창동교회 |
국적 | 조선→대한제국→일본제국 |
교파 | 대한예수교장로회 |
교파 | 대한예수교장로회 |
거주지 | 평안남도 평양부 |
부모 | 아버지 길봉순, 어머니 노씨 |
배우자 | 신선행 |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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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
길선주(吉善宙, 1869년 3월 25일 ~ 1935년 11월 26일)는 한국의 장로교 목사, 교육가,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린다.[1] 아호는 영계(靈溪), 자는 윤열(潤悅)이다. 1907년에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영향으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2]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회(牧會)를 하면서 신앙활동으로 구국운동을 펼쳤고 숭실학교(崇實學校), 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생애
초기 생애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시화에 능했고, 음악을 좋아했으며 한의학(漢醫學)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종교에 심취하여 무(巫)와 선도에 심취하며 입산 수도하다가, 19세에 관우를 섬기는 관성교에 입문했다.[1] 힘이 장사였고 19세부터 차력술을 연마하던 중, 25세 때 친구로부터 선도(仙道)로 장사가 된다는 말을 듣고 입산하여 3년을 힘썼으나, 신통한 것을 얻지 못하고 29세에 하산하였다.[2]
입교
하산후 선도를 권했던 김종섭(金鍾燮)을 만나, 그로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는 이야기와 그가 권하는 한문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천로역정(天路歷程)』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97년(29세)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2년 조사가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을 맡아 전도하였다.[2]
입교 전 관우를 섬기는 무속인으로서 한 무리의 제자들을 거느릴 정도로 신통력을 인정 받았었던 그는 타고난 영적 감응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부흥회를 이끄는 데 자질을 보였다. 그러다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를 위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중에 대중앞에서 공개 회개를 대중 앞에 하였다. 그의 공개회개를 계기로 다른 사람들의 회개도 빗발쳐 나왔고 이것이 평양대부흥의 시점이 되었다고 한다.[3][4]
목회 활동
길선주는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했다.
독립운동
1897년 안창호가 독립협회 평양 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는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함께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체포된 바 있고, 이때 신민회 회원인 장남 길진형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1917년 사망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도장을 이승훈에게 맡기고 3월 1일 당일에는 지방에 있었는데,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와 함께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은 네 명 중 한 명이다. 1919년 당시 평균연령이 40대였던 시기에 이미 51세였고, 안질로 인해 시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1919년 3월 1일 당일 태화관 모임 불참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길선주는 체포되었고 미결수로 2년 가까이 구류된 이후 체포된 민족대표 32인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신학
배덕만 교수는 그가 미국의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수용하여 장로교내에 보수적 신학을 대한민국에 대중화를 시킨 인물로 꼽고 있다.[1]
제임스 게일은 길선주 목사의 스승으로 그의 책 <주님이 오신다(Jesus is Coming)>로 길선주 목사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런 의미에서 길선주 목사는 한국 근본주의 신학의 시조라고 불리고 있다.
사망
1935년 평안남도 강서의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소천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31인은 일제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고 복역 후 독립운동과 항일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최린과 박희도, 정춘수가 추후에 변절하여 친일 행위에 가담하여 친일인사가 되었다.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았기에 독립운동 관련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이후 확인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5]
가족 관계
각주
- ↑ 가 나 김종석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3> 아우내 2016년 p45
- ↑ 가 나 다 [네이버 지식백과] 길선주 [吉善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선주 (2009).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삼인. p.220-221쪽.
- ↑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 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죽은 친구의 부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 ↑ 유영대 기자 (2009년 8월 12일). “고 길선주 목사 90년 만에 애국지사 되다”. 국민일보. 2009년 8월 12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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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참고 자료
- 길선주(1869~1935) 목사, 한국컴퓨터선교회 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