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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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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hisword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월 26일 (금) 12:55 판 (목회 활동)

길선주 목사
노회평양노회
개인정보
출생1869년 3월 15일
조선 평안남도 안주군 성내면 후장동
사망1935년 11월 26일 오전9시
일제강점기의 기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잉차면 고창동교회
국적조선대한제국일본제국
교파대한예수교장로회
교파대한예수교장로회
거주지평안남도 평양부
부모아버지 길봉순, 어머니 노씨
배우자신선행
가족
  • 장남 길진형
  • 차남 길진경
  • 삼남 길진섭
모교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길선주(吉善宙, 1869년 3월 25일 ~ 1935년 11월 26일)는 한국장로교 목사, 교육가,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린다.[1] 아호는 영계(靈溪), 자는 윤열(潤悅)이다. 1907년에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영향으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2] 기독교에 입문후에는 새벽기도와 성경연구에 몰두했다.

40년 목회 동안 2만여 회에 걸쳐 설교했고, 연 380만여 명에게 복음을 전해 7만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으며, 60여 곳에 교회를 설립하고, 3천여 명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추정된다.[3]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회(牧會)를 하면서 신앙활동으로 구국운동을 펼쳤고 숭실학교(崇實學校), 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고 경영에도 참여했다.

생애

초기 생애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시화에 능했고, 음악을 좋아했으며 한의학(漢醫學)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종교에 심취하여 (巫)와 선도에 심취하며 입산 수도하다가, 19세에 관우를 섬기는 관성교에 입문했다.[1] 힘이 장사였고 19세부터 차력술을 연마하던 중, 25세 때 친구로부터 선도(仙道)로 장사가 된다는 말을 듣고 입산하여 3년을 힘썼으나, 뜻한 바를 얻지 못하고 29세에 하산하였다.[2]

기독교 입문

하산후 선도를 권했던 김종섭(金鍾燮)을 만나, 그로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는 이야기와 그가 권하는 한문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천로역정(天路歷程)』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97년(29세)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1898년에는 교회의 영수(領袖)가 되었다.[4]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2년 조사(助事)가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을 맡아 전도하였다.[2]

입교 전 관우를 섬기는 무속인으로서 한 무리의 제자들을 거느릴 정도로 신통력을 인정 받았었던 그는 타고난 영적 감응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부흥회를 이끄는 데 자질을 보였다.

목회 활동

길선주는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같은해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를 위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중에 대중앞에서 공개 회개를 하였다. 그의 공개회개를 계기로 다른 사람들의 회개도 빗발쳐 나왔고 이것이 평양대부흥의 시점이 되었다고 한다.[5][6]

열정적인 목회자로, 부흥사로 활약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고 부흥운동을 통하여 심령의 역사를 크게 나타내었으며,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한국교회의 현대화와 토착화를 위해서도 크게 노력하였는데, 그 당시의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해, 교회당 안에 설치된 남녀 좌석 사이의 휘장을 철거 하였다.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으로 도입하여 행사 때나 교회 명절에 연주하게 하였고, 찬양대와 교회음악단을 조직하여 교회선교활동을 활성화시켰다. 연극과 성화(聖畵)에도 관심을 두어, ‘성극의 밤’을 열기도 하였다. 1910년 제4회 노회에서 1백만 구령운동을 제창하여, 국권상실의 수치와 비운에 빠진 민족을 구령으로 위로하고 민족의 최후 보루를 교회에 구축하고자 하였다.[2]

독립운동

1897년 안창호독립협회 평양 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는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함께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체포된 바 있고, 이때 신민회 회원인 장남 길진형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1917년 사망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도장을 이승훈에게 맡기고 3월 1일 당일에는 지방에 있었다.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와 함께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은 네 명 중 한 명이다.

1919년 당시 평균연령이 40대였던 시기에 이미 51세였고, 안질로 인해 시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1919년 3월 1일 당일 태화관 모임 불참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길선주는 체포되었고 미결수로 2년 가까이 구류된 이후 체포된 민족대표 32인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신학

배덕만 교수는 그가 미국의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수용하여 장로교내에 보수적 신학을 대한민국에 대중화를 시킨 인물로 꼽고 있다.[1]

제임스 게일은 길선주 목사의 스승으로 그의 책 <주님이 오신다(Jesus is Coming)>로 길선주 목사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런 의미에서 길선주 목사는 한국 근본주의 신학의 시조라고 불리고 있다.

저서로 『해타론』과 『만사성취』가 있고, 유고로 『말세학』 · 『길선주목사설교집』 등을 남겼다.

사망

1935년 평안남도 강서의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소천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31인은 일제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고 복역 후 독립운동과 항일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최린박희도, 정춘수가 추후에 변절하여 친일 행위에 가담하여 친일인사가 되었다.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았기에 독립운동 관련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이후 확인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2009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7]

가족 관계

  • 장남 : 길진형, 신민회 회원, 고문 후유증으로 1917년 사망
  • 2남 : 길진경, 목사, 1980년 평전 《영계 길선주》 출간
  • 3남 : 길진섭, 화가

각주

  1. 김종석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3> 아우내 2016년 p45
  2. [네이버 지식백과] 길선주 [吉善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네이버 지식백과] 길선주 [吉善宙]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가스펠서브)
  4. [네이버 지식백과] 영수 [領袖, leader] (교회용어사전 : 행정 및 교육, 2013. 9. 16., 가스펠서브)......우리나라 선교 초기 장로교회의 평신도 직분 중에 하나. 조사(助事)를 돕고 교회를 돌보기 위해 신설된 직분이다...(중략)...초대 한국 교회 발전에 영수가 끼친 공헌은 지대하나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점점 그 직분은 사라져 1950년대 후반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5. 김선주 (2009).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삼인. p.220-221쪽. 
  6.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 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죽은 친구의 부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7. 유영대 기자 (2009년 8월 12일). “고 길선주 목사 90년 만에 애국지사 되다”. 국민일보. 2009년 8월 12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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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