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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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송(山訟)은 조선 시대 산소(山所)와 관련된 사송(詞訟)이다. 조선 시대 중기와 후기에 풍수 사상의 영향으로 명당에 묏자리를 만들려는 음택 풍수가 유행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가문의 선산에 몰래 부모의 묘자리를 만들거나, 남의 묘자리 주위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는 것 때문에 다툼이 발생하는 형태였다. 노비와 관련된 노비송(奴婢訟), 토지와 관련된 전답송(田畓訟)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사송을 이루었다.
산송이 빈번하게 일어난 원인
[편집]산송은 조선 중기 이후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는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영조는 근래 상언의 (上言)의 열에 여덟, 아홉은 산송이라고 우려하며 늑장(勒葬)·유장(誘葬)·투장(偸葬)등을 엄중하게 금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1] 산송이 이렇게 큰 사회 문제가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유교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부모님께 마지막 효도를 하기 위해 묏자리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 음택 풍수가 유교 사상과 결합하여 묏자리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 신분제의 동요로 인해 중인, 상인 층이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선산을 뺏는 경우가 많아졌다.
산송과 관련된 유명한 사건
[편집]-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사이에서 윤관 장군 묘역을 두고 400년 가까이 이어진 산송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산송이다. 1764년 6월 영조는 양 문중이 묘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중재했으나[2] 이듬해 또 다시 문중간에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격노한 영조가 두 문중의 대표자 심정최(沈廷最)와 윤희복(尹熙復)을 직접 국문(鞠問)하여 귀양보냈다.[3] 2006년 음력 4월 10일, 파평 윤씨 대종회와 청송 심씨 대종회는 파평 윤씨 측이 이장에 필요한 부지를 제공하고 청송 심씨 측이 윤관 장군 묘역에 조성된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기로 합의하면서 조선시대부터 392년 동안 이어진 묘지 다툼을 끝내기로 하였다.[4]
- 조선 후기의 문신 어윤중은 아관파천 당시, 경기도 용인에서 산송과 관련하여[5] 원한을 품은 양반에게 살해당했다.
참고 문헌
[편집]- ↑ 조선왕조실록 영조 3년 3월 20일
- ↑ 조선왕조실록 영조 40년 6월 14일
- ↑ 조선왕조실록 영조 41년 윤2월 23일
- ↑ 파평 윤씨-청송 심씨 400년 묘지 다툼 종결 한겨레 2007년 12월 23일
- ↑ 노중평 (2015년 9월 14일). “모함에 빠지다”. 브레인미디어. 2022년 4월 8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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