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개조 사업
파리 개조 사업은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진행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재건설하였던 사업이다. 나폴레옹 3세가 오스만 남작을 파리시장으로 임명한후 대대적인 도시 정비 사업을 맡겼다.[1][2] 당시 파리 시내는 중세의 유산으로 인해 좁고 구부러진 도로가 많았다. 이런 구조는 바리케이트를 쉽게 설치할 수 있어 시위 진압에 어려움이 있었고 도심은 비위생적이며 교통체증 현상이 극심했다. 정비사업을 통해 도로폭을 넓히고 직선화하였으며 상하수도망 재정비, 가스 가로등 설치, 대규모 녹지 조성 등을 통해 위생상태와 도심 생활환경을 크게 개선하였다.[1]
도시정비사업의 가장 큰 목적은 폭동과 시위의 장소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서[3] 좁고 구불어진 골목을 넓고 직선화하여 시위자들이 바리케이트를 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4] 당시 폭동은 바리케이트를 친후 통행을 막고 벌이는 일명 '바리케이트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4] 도로폭을 넓히고 직선화 하여 시위발생을 초기에 인지하고 진압군이 신속하게 접근하여 조기진압을 하고자 했다.[5] 이를 통해 소요와 폭동이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인 요소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폭동을 조기에 신속히 진압하여 폭동이 혁명으로 번지는것을 막아야 자신의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2제정은 부르봉 왕조보다 더한 절대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파리시내에서는 공화주의자들에 의한 폭동이 빈번했기 때문이다.[3]
배경
[편집]19세기 중반의 파리는 중세 도시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좁은 길들이 미로같이 얽혀 있어서 파리 시민들은 만성적인 교통 체증에 시달렸고 루브르궁과 같은 역사적 건물들은 무질서하게 건축된 허름한 건물들에 포위되어 그 위용을 나타내지 못했다. 상수도와 하수도 체계의 부재와 녹지 부재는 생활 상의 불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염병 창궐과 같은 심각한 위생 문제를 야기했다.
또한 폭이 좁고 곡선화된 도로에 시위대가 쉽게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위를 하였다. 바리케이드 설치를 어렵게하고[6] 진압군이 시위대에 쉽게 접근하여 신속하게 진입을 할 수 있게 도로폭을 넓히고 직선화 추진이 필요했다.[7][8][9] 나폴레옹 3세는 시위를 빠르게 초동진압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유지에 큰 도움이 될것으로 판단했다. 여러모로 파리보다 현대적이었던 런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나폴레옹 3세는 예전부터 파리의 재건설을 생각해왔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새로운 파리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1853년 파리 시장에 오스만 남작을 임명하고 파리의 도시 구조 개혁을 명하였다.[1]
성과
[편집]나폴레옹 3세의 기본 개혁 방안에 더해진 오스만의 구체적인 계획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의 바탕이 되었다. 오스만은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최초로 도시 전체를 체계적으로 건설했다. 오스만 이전의 유럽의 신도시 건설은 주로 군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아름다운 도시 건설에 치중하였으나, 오스만은 도시 기반 시설부터 도로 체계, 녹지 조성, 미관 관리, 도시 행정에 이르는 도시의 건설과 운영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간과하지 않고 중세 도시 파리와는 전혀 다른 근대화된 파리를 창조했다.
기차역과 주요 광장들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대로가 만들어졌고 도로 주위에는 오스만 양식 건물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식의 건물들이 들어섰다. 파리 각지에 크고 작은 녹지가 조성되었고 주택과 함께 각종 공공 시설과 문화 시설이 세워졌다. 또한 상수도망과 하수도망의 건설은 파리 시민의 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그 밖에 노트르담 성당과 같은 기존의 역사적 건물의 대대적인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졌고 오페라 갸르니에 같은 후대에까지 빛날 건물들이 세워졌다. 공들여 보수하고 새로 지은 주요 기념물들은 대로가 끝나는 부분에 위치하게끔 해서 최대한 사람들의 시야에 노출되게 배려하였다.
유산
[편집]오스만의 새로운 파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파리 시민들은 과도한 공사 비용에 불만이 많았지만 파리를 방문한 많은 외국인들은 오스만의 파리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파리의 도시 계획은 서구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오스만의 파리 개조 사업이 놀라운 것은 19세기 중반에 건설된 도시가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도 큰 변화없이 훌륭히 도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유효한 19세기 도시 미학은 세계 각지에서 파리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당시의 도시 설계는 파리가 유럽 최대의 도시 경제권(일-드-프랑스)의 중심 도시로 기능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같이 보기
[편집]외부 링크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325
- ↑ [네이버 지식백과] 나폴레옹 3세 [Napoleon III] - 두 번째 쿠데타와 두 번째 제국 (프랑스 왕가, 홍용진)......1854년부터는 17세기 런던시 재정비에 영감을 얻어 오스만 남작에게 파리 재정비 사업을 위임하였다. 이렇게 해서 복잡하고 비위생적인 파리의 도시공간은 전면적으로 개혁되기 시작하였다. 구불구불한 길들을 확장하면서 직선화하고 상하수도를 대폭 확충하는 한편, 많은 녹지와 공원을 조성하여 맑은 공기가 유지되도록 하였다. 복합 상업단지와 병원, 극장, 은행, 우체국 등 공공 건축물들을 곳곳에 확충하여 파리의 도시공간을 획기적으로 근대화하였다.
- ↑ 가 나 서운영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 궁리출판 2012.1.20 p42
- ↑ 가 나 서운영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 궁리출판 2012.1.20 p44
- ↑ 서운영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 궁리출판 2012.1.20 p46
- ↑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창비 2006.6.26 p22......당시 몇개의 간선도로의 폭을 대폭 확장한 숨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게 실은 바리케이드를 치기 어렵게 하기 위한 것이었대요. 길 양쪽의 건물이 높고 또 돌로 되어 있으니까 폭이 좁은 길에는 아주 쉽게 바리케이드를 칠 수 있었고 또 몇군데만 막으면 전 구역이 이른바 해방구가 될 수 있었거든요. 당신이 '레미제라블'을 읽었거나 영화를 보셨으면 알 수 있듯이 바리케이트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투쟁의 거점 확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었어요...(중략)...바리케이드에 힘입어 권력을 잡게 된 그가 바리케이드를 못치게 하려고 애썼던 것도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기지요.
- ↑ [네이버 지식백과] 혁명의 도시와 오스만의 근대적 도시 정비 (도시는 역사다, 2011. 6. 1., 최호근, 이영석, 신규환, 민유기, 김승욱, 박진한, 김수환, 김백영, 박삼헌, 박진빈)......파리의 대대적인 도시 정비는 부르주아에게 이중의 공포였던 전염병과 도시 폭동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바리케이드를 쉽게 만들지 못하게 하고 군대의 진입을 원활하게 할 대로 건설과 교통망 정비 그리고 위생 설비 확충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 ↑ [네이버 지식백과] 오스만 (두산백과)......오스만 남작이 파리지사를 지낼 당시 파리는 인구 급증 때문에 비위생적인 상태였고, 계속되는 폭동으로 바리케이드화해 도시반란에 이용되는 건물을 없애고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대대적인 재건축을 단행했다.
- ↑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324